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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 성곡동(城谷洞)의 지명 유래

D DX관리자
2026.10.07 01:51 5 0

 

안산시 성곡동(城谷洞)의 지명 유래와 역사적 변천

현재의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은 시화산업단지를 비롯한 공업지역의 이미지가 강한 곳이다. 넓게 정비된 도로와 공장 건물, 물류시설과 산업시설이 이어지는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 이곳이 과거에는 농촌의 자연마을과 들판이 펼쳐져 있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나 성곡동이라는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의 산업도시 이전에 존재했던 옛 마을의 모습과 행정구역의 변화를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성곡동(城谷洞)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성(城)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지명이 아니다. 조선시대 안산군 와리면(瓦里面)에 존재했던 성두리(城頭里)와 무곡리(茂谷里)라는 두 옛 마을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만들어진 지명이다. 즉 성두리의 ‘성(城)’과 무곡리의 ‘곡(谷)’을 합하여 성곡리(城谷里)라는 새로운 이름이 만들어졌고, 훗날 이 이름이 오늘날의 성곡동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성곡동이라는 지명은 하나의 자연지형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두 마을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지명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곡동의 옛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두리와 무곡리라는 두 마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성곡동 일대는 안산군 와리면에 속해 있었으며, 이 지역에는 성두리와 무곡리가 별개의 마을로 존재하였다. 성두리는 흔히 ‘잿머리’라고도 불렸으며, 도란말·안말·골우물 등을 아우르는 자연마을이었다. 무곡리는 ‘무들’이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장가골·장자골·느티나무재 등의 마을과 지명이 함께 전해진다. 오늘날에는 산업단지와 도로, 공장시설에 의해 옛 자연취락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지만, 과거의 성곡동은 여러 작은 자연마을이 서로 연결되어 생활하던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특히 잿머리라는 이름은 오늘날 성곡동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성두리라는 지명과 잿머리의 관계에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디지털안산문화대전과 안산 지역 향토자료에서는 잿머리 일대의 성황당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 주변에 성을 쌓았다는 전승을 바탕으로 성두리라는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지명의 민속적·전승적 유래를 보여주는 자료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며, 특정 사건이 실제로 언제 일어났는지를 입증하는 역사적 기록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지명에는 공식적인 행정 명칭의 형성과 함께 주민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구전 지명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곡동의 경우에도 ‘성두리=잿머리’라는 관계와 여러 자연마을의 명칭이 함께 전해지고 있어, 행정지명과 생활지명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성곡리라는 이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조선 후기에서 근대 초기로 넘어가는 행정구역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안산 지역의 옛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18세기 후반의 『호구총수』부터 1895년 무렵의 『기전읍지』, 그리고 1912년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등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의 마을 이름과 행정구역이 확인된다. 특히 1912년 자료에는 와리면에 무곡리와 성두리가 각각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성곡리라는 이름이 생기기 이전에는 성두리와 무곡리가 각각 독립된 리(里)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성곡동이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이름이 아니라, 기존의 두 마을이 행정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 향토자료에서는 1912년 2월 5일 성두리와 무곡리를 통합하면서 두 지명에서 각각 한 글자씩 취하여 성곡리(城谷里)로 이름을 정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성곡리라는 이름은 성두리의 ‘성(城)’과 무곡리의 ‘곡(谷)’을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912년의 지명 통합과 1914년의 대규모 행정구역 개편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1912년은 성두리와 무곡리가 성곡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되는 과정이고, 1914년은 안산군 자체가 시흥군에 통합되면서 기존의 면과 리 체계가 크게 재편된 시기이다. 두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행정개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14년은 성곡동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산군은 시흥군에 통합되었고, 기존 안산군 와리면은 군자면으로 통합·개편되었다. 그 결과 성곡리는 시흥군 군자면 성곡리가 되었다. 당시의 행정구역 자료를 보면 와리면에 속했던 여러 옛 마을들이 1914년 개편을 거치면서 군자면 아래의 새로운 리 체계로 정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성곡동뿐 아니라 신길동·목내동·원곡동·초지동·원시동 등의 지명 역시 이 시기의 행정구역 재편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안산의 지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1914년 개편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곡리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뒤에도 지역 주민들의 생활공간에서는 행정명칭보다 오래된 자연마을 이름이 계속 사용되었다. 잿머리와 무들, 도란말, 안말, 골우물, 장자골, 느티나무재 등의 이름은 단순한 옛 지명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했던 공간의 기억을 담고 있다. 행정구역에서는 하나의 ‘성곡리’였지만 주민들의 일상에서는 다시 여러 자연마을과 들, 골짜기, 길, 우물 등의 이름으로 공간을 구분했던 것이다. 오늘날 지도에서 하나의 법정동으로 표시되는 지역도 과거에는 이처럼 여러 생활권이 겹쳐 존재했다는 사실을 성곡동의 옛 지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곡동의 역사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공간은 잿머리 성황당이다. 현재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 76번지 일대에 위치한 잿머리 성황당은 안산 지역의 대표적인 성황당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도 잿머리 성황제가 이어지고 있다. 안산시 자료에서는 잿머리 성황당의 유래를 고려 성종 때 내부시랑 서희(徐熙)의 이야기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서희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잿머리 해안에서 배를 타려 했으나 폭풍우를 만나 출항하지 못했고, 그날 밤 꿈에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비와 관련된 두 여인이 나타나 사당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서희가 사당을 세우고 제를 지내자 바다가 잔잔해져 무사히 사신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이 이른바 잿머리 성황당의 발생설화이다.
 

다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전승을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서희가 실제로 고려 성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이라는 사실과 잿머리 성황당에 관한 설화는 서로 다른 차원의 자료이다. 서희라는 역사적 인물의 활동 자체는 문헌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꿈에 나타난 두 여인과 사당을 세운 과정, 그 결과 폭풍이 멎었다는 이야기는 잿머리 성황당에 전해 내려오는 발생설화이다. 따라서 이를 실제 사건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성황당이 어떻게 형성되었다고 지역사회에서 기억하고 전승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민속적 자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오히려 이러한 전승이 오랜 시간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잿머리라는 공간이 안산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신앙과 공동체의 장소였는지를 보여준다.
 

잿머리 성황당은 성곡동의 지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성두리와 잿머리가 같은 공간을 가리키는 옛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성두리의 ‘성’이 현재 성곡이라는 이름의 첫 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곡이라는 이름 안에는 과거 성두리와 무곡리라는 두 마을의 흔적뿐 아니라 잿머리라는 생활지명까지 함께 겹쳐 있다. 하나의 현대적인 행정동 이름만 보면 단순한 두 글자의 지명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옛 마을의 이름과 주민들의 생활권, 성황당과 마을신앙, 그리고 근대 행정구역 개편의 흔적이 차례로 쌓여 있는 셈이다.
 

성곡동의 또 다른 특징은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지역의 성격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과거 성곡리 일대는 자연마을과 농경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생활하던 공간이었지만, 안산이 대규모 공업도시로 개발되면서 성곡동 역시 산업지역으로 변화하였다. 안산시는 1970년대 중반부터 반월신공업도시 조성을 추진했고, 1986년 1월 1일 안산시가 시로 승격되면서 오늘날의 안산이라는 도시 체계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성곡리 역시 농촌의 자연취락 중심 공간에서 산업도시를 구성하는 지역으로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가 설치되면서 시흥군 군자면 성곡리는 안산시 성곡동이 되었다. 당시의 행정구역 변화는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안산이라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면서 과거 농촌지역의 생활공간이 도시계획과 산업개발의 대상이 되었고, 기존 자연마을의 모습도 점차 변화하였다. 이후 성곡동은 안산의 산업지역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현재는 단원구에 속하는 법정동으로 남아 있다. 안산시 통계에서도 현재 성곡동은 단원구의 법정동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면적은 약 9.93㎢에 이른다.
 

이러한 변화는 성곡동에서 특히 극적으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마을과 들판, 농경지가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현재는 공장과 산업시설이 지역의 주요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과거 성곡동에 살았던 주민들의 증언에서도 공단이 들어서면서 기존 마을 사람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안산시가 소개한 잿머리 성황제 관련 자료에는 공업도시가 형성되기 전 성곡동에 살았던 주민들이 과거 농사를 지으며 성황제를 준비했던 기억과, 공단이 들어선 뒤 마을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산업화가 단순히 토지의 용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한 지역의 공동체 구조와 주민들의 생활방식까지 크게 변화시켰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옛 마을의 공간은 대부분 도시와 산업시설 속으로 편입되었지만, 잿머리 성황당과 성황제는 과거 성곡동 주민들의 공동체 기억을 오늘날까지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가 되고 있다. 산업단지 조성으로 옛 주민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음에도 성황제가 열리는 날에는 옛 주민들이 다시 모여 과거의 이웃과 마을을 기억한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과거에는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한 공동체 의례였다면 오늘날에는 안산 시민의 평안과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통문화 행사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성곡동의 지명은 그래서 단순히 ‘성곡’이라는 두 글자로 끝나지 않는다. 성곡(城谷)이라는 이름에는 성두리와 무곡리라는 두 옛 마을이 들어 있고, 성두리에는 다시 잿머리라는 오래된 생활지명이 들어 있다. 그 주변에는 도란말·안말·골우물과 같은 자연마을 이름이 있었으며, 무곡리에는 무들과 장자골·느티나무재 등 여러 생활지명이 존재했다. 행정구역은 1912년 성곡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되었고, 1914년에는 시흥군 군자면 성곡리로 편입되었으며, 1986년에는 안산시 성곡동으로 다시 바뀌었다. 한 지역의 이름이 바뀌어 온 과정만 보아도 조선시대의 마을사회에서 근대 행정구역으로, 다시 현대 산업도시로 이어지는 지역의 변천사가 압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곡동이라는 이름에서 중요한 것은 ‘성(城)’과 ‘곡(谷)’이 자연스럽게 조합된 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옛 마을의 이름을 하나씩 취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의 지명은 행정구역 통합 과정에서 기존 지역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례로 볼 수 있다. 성두리와 무곡리 중 한쪽의 이름만 남기는 대신 두 마을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성곡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성곡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행정명칭이 아니라 두 옛 마을이 하나의 지역으로 합쳐졌던 역사적 과정을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성곡동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산업도시 안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만으로 이 지역의 역사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곳에는 성두리와 무곡리가 있었고, 성두리에는 잿머리라는 오래된 마을이 있었으며, 주민들은 도란말과 안말, 골우물 등의 생활공간에서 살아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두리와 무곡리는 성곡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합쳐졌고, 1914년에는 시흥군 군자면의 일부가 되었으며, 1986년에는 안산시 성곡동이 되었다.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옛 자연마을의 상당 부분은 사라졌지만 잿머리 성황당과 성황제 같은 문화적 기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성곡동(城谷洞)은 성두리(城頭里)의 ‘성(城)’과 무곡리(茂谷里)의 ‘곡(谷)’을 합쳐 만든 이름으로, 두 옛 마을의 통합과 안산 지역의 행정구역 변천을 함께 담고 있는 지명이다. 조선시대의 자연마을에서 근대의 성곡리로, 다시 현대의 안산시 성곡동으로 변화하는 동안 이곳의 풍경과 주민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지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성곡동’이라는 두 글자 안에는 성두리와 무곡리라는 옛 마을의 흔적, 잿머리와 무들이라는 생활지명, 그리고 산업화 이전 이곳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공동체 기억이 함께 남아 있다. 도시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지만, 지명은 그 변화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역사적 기록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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